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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987' 제작자 "긴축 예산→상업 영화, 강동원·김윤석·하정우의 힘"

(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2018-01-16 16:12 송고 | 2018-01-16 17:51 최종수정
2018.1. 16. 삼청동 카페. 영화 '1987' 제작사 우정필름 이우정 대표 인터뷰. © News1 강고은 에디터

영화 '1987'(장준환 감독)은 여러 사람의 힘과 뜻이 모여 탄생한 영화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과 중심에 일찌감치 '6월 항쟁' 배경의 영화를 기획하고 사람을 모아 온 제작자, 우정필름 이우정 대표가 있다. 

'1987'은 지난 15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 입장권 통합 전산망 기준 591만 명의 누적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순항 중이다. 그보다 앞서 개봉한 '신과함께-죄와벌'의 기세가 매우 강했지만, 이내 영화 자체의 힘으로 뒷심을 발휘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우정 대표는 "이제는 어느 정도 영화만의 페이스를 찾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다소 분석적인 소감을 내놓았다.  

'1987'은 내용이 내용인 만큼, 보수적이었던 지난 정권 아래서 쉽게 기획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 대표는 "'6월 항쟁'의 30주년이 되는 해에 꼭 영화를 선보이고 싶었다"며 개봉 년도가 꼭 2017년이어야 했던 이유를 알렸다. 내심 2017년이라면 정권 말기라 영화를 만드는 데 큰 위험요소는 없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영화지만,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장준환 감독이 메가폰을 잡기로 했음에도 기획 초반 투자자들의 반응은 다소 미지근했다. 이 대표의 표현에 의하면 시나리오를 건네고 "간을 조금" 봤는데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지켜보겠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런 분위기에 가장 처음 반전을 준 것은 배우 강동원의 캐스팅이었다. 장준환 감독과 단편 영화를 통해 인연을 맺었던 강동원이 '1987'의 작품에 맨 처음 관심을 갖고 출연을 하기로 한 것. 이후로 김윤석과 하정우 등 스타 배우들이 합류하면서 영화가 힘을 받기 시작했다.  

이우정 대표는 "강동원이 초반 가장 큰 힘을 줬다. 기본적으로 우리 영화가 저예산이나 독립영화까지는 아니어도 예산을 긴축해서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강동원 배우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면서 상업적으로 세팅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줬다"며 "스타 캐스팅이 안 됐을 경우에는 예산을 낮춰서 만들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 갈림길에서 (강동원이) 출연 의사를 밝혀주면서 상업 영화의 틀로서 이 영화를 고민할 수 있게 됐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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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김윤석도 장준환 감독과의 인연으로 일찌감치 '1987'에 합류했다. 이 대표는 "강동원에 이어 김윤석, 하정우가 캐스팅된 다음날부터 투자사 관계자들이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강동원, 김윤석, 하정우 세 배우가 세팅된 것만으로 충분히 상업영화로 갈길을 갈 수 있었다"며 " (배우들 덕에) 제작자로서는 비교적 순탄한 제작과정을 거쳤다"고 설명했다. 

인터뷰 말미 이 대표는 강동원에 대해 "매우 어른스러운 배우"라고 칭찬 한마디를 보탰다. 자신보다 어린 사람인데도 어른스러운 태도 때문에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고. "강동원과 띠동갑"이라고 밝힌 그는 "(강동원이) 저보다 어른스러워서 제가 부끄러웠다. 배우로서 태도가 매우 좋고, 파워있는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관용과 포용력이 있어서 나를 오히려 부끄럽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고 강동원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eujenej@news1.kr
출처 : http://news1.kr/articles/?3208478

[빅3③] <1987> 김경찬 작가, 이우정 제작자
글 이화정 사진 오계옥 2018-01-01

6월항쟁은 명백한 승리의 역사, 그때의 경험을 되새김질하면서 호응하길

이우정 제작자, 김경찬 작가(왼쪽부터).

숨막히고 뜨겁고, 그래서 마침내 울분으로 끓어올랐던 시대. 최규석 작가가 6월항쟁을 소재로 해 그린 만화 <100℃>에는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하지만 사람도 100℃가 되면 분명히 끓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1987년 1월 4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그리고 6월 9일 최루탄에 맞은 이한열 열사의 죽음, 청년의 무고한 죽음에 맞닥뜨린 ‘보통 사람들’은 그해 100℃의 온도로 끓어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민국 민주화의 분수령이 된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1987>은 2016년 겨울, 광장의 승리, 뜨거운 온도가 어디서 발화됐는지 되짚어가는 영화다. 당시 10대의 나이로 그 사건을 목도했던 김경찬 작가와 이우정 제작자에게 30년이 지난 지금, 더 늦지 않게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야 했던 이유를 들어보았다.

김우형 촬영감독, 장준환 감독(왼쪽부터).

-원래 두 사람이 준비하던 사극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이 영화를 먼저 하게 됐다. 6월항쟁은 지난 정권에서 선뜻 진행하기 힘든 소재였고, 초반 투자의 어려움도 컸던 작품이다.

=김경찬_ 사극은 이제 막 쓰기만 하면 되는 때였다. 그때 YTN의 송태엽 선배랑 막걸리를 마시는데, 한마디 하더라. “왜 6월항쟁은 영화로 안 만드는 거야.” 토르의 망치가 뒤통수를 갈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날 바로 이우정 대표한테 조금만 미뤄달라, 너무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고 했다. 이우정 대표가 ‘옳다구나’ 하고 받더라. (웃음) 주변의 영화하는 지인들이 많이 말린 걸로 아는데, 꿋꿋이 버티더라. 나는 PD로 20년간 활동하다 영화를 막 시작한 터라 다행히 주변에서 말리는 지인들이 없었지만. (웃음)

=이우정_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박종철 열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걸 작가님에게 꺼낼까 말까 고민은 했는데 워낙 접근이 어려운 소재라 사극을 먼저 하려고 했다. 그런데 먼저 이 이야기를 하겠다는 소리를 듣게된 거다. 그때, ‘내가 언제 이분한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하는 착각이 들더라. 김경찬 작가가 “내가 같이 하게 된 건 이우정 당신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데, 김 작가가 이 소재를 말했을 때 굉장히 기다리던 친구,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김경찬_ 1987년에 10대를 보냈는데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사진이 나온 <중앙일보>를 실시간으로 봤다. 알고 보니 이한열 열사가 같은 동네에 살았더라.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같은 오락실에 가고, 같은 만홧가게를 간 형이었을 거다. 그때의 충격과 공포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다. <1987>은 그걸 위해서 달려간 영화였다. 내가 그 신문을 보면서 느꼈던 공포를 연희(김태리)를 통해 관객 역시 봤으면 했다. 그것 하나만 정확히 보여주자. 그때가 아니면 못 쓸 것 같더라. 2017년은 예정대로라면 대선이 있었고, 6월항쟁 30주년이기도 했다. 그러자면 2017년 가을이나 겨울에는 개봉을 해야 하니, 시나리오 쓰는 시기가 딱 나오더라.

-원래 제목이 지금의 <1987>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었다. 영화는 당시를 살던 다양한 ‘보통 사람들’의 역할을 보여준다. 마치 양파 껍질을 까듯 캐릭터와 그에 상응하는 배우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구성이 신선했다. 영화의 무거운 톤을 상쇄해주어 관객이 한순간도 지루할 틈 없게 만드는 영리한 선택이었다.

이우정_ 2015년 국면에서 볼 때, 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면 87년 6월항쟁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나는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이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사건을 왜 지금까지 영화화하지 않을까, 항상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소재의 영화를 만든다면 감당할 태도도 필요했고, 김 작가 말처럼 타이밍도 중요했다. 만약 김경찬이라는 작가를 못 만났다면 내 안에서 끝날 고민이었다. 영화계에 박종철 열사 프로젝트도, 이한열 열사 중심 프로젝트도 따로따로 있었지만 김경찬 작가처럼 박종철 열사에서 시작해 이한열 열사로 끝을 맺는 그런 구성,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어느 기획보다 새롭더라. 심지어 작업 속도도 엄청 빨랐다. 초고가 한달은 걸리겠지 했는데 2주 만에 ‘다 썼다’고 연락이 왔다.

김경찬_ 독립 PD로 생활하면서 기획, 제작, 각본, 출연까지 하다보니 뭐든 빨리 하는 편이다. 시나리오 쓰려고 자료 조사를 하면서 알았다. 왜 영화계가 이 이야기를 지금까지 못 만들었는지. 이야기 자체가 사건 중심인 데다 인물이 너무 많다. 주요 인물이 수백명이다. 지금 최순실을 영화로 만들면 3천명은 언급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웃음) 어떤 인물을 선택하고, 주인공은 누구로 할 것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 프로젝트다. 지금 시대에 맞게 만들려면 결국 선택은 하나였다. 주요 인물을 다수로 두고 릴레이 방식으로 풀어가자. 특히 특정 인물로 가게 될 경우 영화적으로 재밌는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역사적 사실과 멀어질 위험이 크다. 아직도 스스로 언론인이라는 생각이 크고, 그 매체만 영화로 바뀌었을 뿐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늘 같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팩트를 난도질하면서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는 게 내 제1 원칙이었다. 주제를 전달하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1987> 촬영현장.

-30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 피해를 본 분들, 유족들까지 아픔을 안고 살아 계신다. 그 부분에 대한 주의도 중요한 지점이었다. 어떻게 실제 인물들과 접촉했나. 또 그분들의 반응은 어떻던가.

김경찬_ 최초 접촉한 게 2016년 2월이었다. 이한열 기념관에서 하나 남은 운동화를 복원했고 그것을 복원한 전문가의 세미나가 있었다. 행사 끝나고 나서 관장님에게, 내가 이런 이야기를 써도 되겠냐고 했더니 마음껏 쓰라고 하시더라. 나중에 보니 그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신 것 같다. 유족들을 만난 건 캐스팅고를 완료하고 나서였다. 그전에 안 보여드린 이유는 하나였다. 영화화한다고 찾아온 유명 감독이나 제작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매번 엎어져서 상처를 많이 받으신 것 같았다.

이우정_ 정말 확실히 이 영화가 들어가게 된 시점에서 유족들과 접촉했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 관계자 양쪽으로부터 컨펌을 받았다. 시나리오에 대해 지지와 지원을 받았고, 그 지지로부터 벗어나지 말자, 왜곡하지 말자는 마음을 다졌다. 그게 어찌보면 이 영화를 만들어온 이유이자 우리 전체가 가진 기본적인 태도였으니까.

김경찬_ 박종철 열사는 형님과, 이한열 열사는 어머님, 둘째누님과 소통했다. 대원칙이 ‘우리 영화로 인해서 유족들이 상처를 받는 건 막아야 한다’였다. 유일한 방법이 진행상황을 알리고, 뵙고 말씀도 듣는 거라 생각해서 처음에는 사소한 것까지 컨펌을 받았다. 그랬더니 “알아서 해라. 왜 일일이 보고하냐”고 하시더라. (웃음) 창작자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셨다. 시사회에 초대했으나 이한열 열사 가족은 아직 영화를 못 봤다. 누님들은 도저히 마음이 안움직인다고 하시더라. 어머님은 아직도 날마다 바뀌신다. 오신다고 하다가도 다음날 전화하셔서 “힘들 것 같아요” 하신다.

-영화 제작 단계에서 촛불시위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실질적으로 제작 과정에서 체감했던 변화가 있었는지, 또 그 변화가 반영되기도 했는지 궁금하다.

김경찬_ 2017년에는 레임덕이 올 거고 그래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가을에 사건이 있었고, 그 시기가 빨리 오면서 많은 고민 지점들이 풀렸다. 장소협찬이나 이런 것들도 수월해진 거다.

이우정_ 내가 철이 없는 건지, 애초 시작할 때부터 당시 정국이 주는 부담은 없었다. 그런데 어쨌든 그 변화가 제작 환경에 준 영향이 컸다. 워낙 소재가 소재다 보니 어렵게 만들게 될 거라고 우리끼리는 단단히 각오를 다지고 있었는데, 이후 너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더라. 캐스팅이 얼추 될 즈음 최순실 태블릿 관련 소식이 나왔고, 그즈음 투자자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영화의 타고난 운명이 그런 거였나 보다.

김경찬_ 운명이 맞다. 고비가 올 때마다 동방에서 귀인이 나타나더라. (웃음) 투자도. 제작도 어려웠다. 누구 하나 주인공이 아닌 이 독특한 구성에, 소재는 소재대로 어렵고 캐스팅도 답이 안 나올 때였다. 그런데 강동원씨가 장준환 감독과 인연이 있고, 자연스럽게 이 프로젝트를 알게 되어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

이우정_ 강동원씨의 정확한 코멘트가 이거였다. “제가 누를 끼치지 않는다면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그 말 듣자마자 “그럼 뭘 시키지?” 했다. (웃음) 대통령이 ‘역사를 모르면 혼이 비정상’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으니, 앞으로나 뒤로나 답이 없어 보일 때였다. 그땐 저예산으로라도 만들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말 그대로 돌파구가 보이더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인공이 부재한 모험적인 선택인데, 다수의 주인공을 통해 이걸 상업적이자 대중적으로 흥미롭게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중심 악역으로 등장하는 대공수사처의 수장 박 처장(김윤석)의 역할이 컸다. ‘시대가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봤을 때, 그 깊이를 파고들수록 자칫 미화될 소지가 큰 인물이다. 어떻게 톤을 조절했나.

김경찬_ 박 처장은 완전히 베일에 싸인 인물이라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나름 언론사에서 20년을 일했고 취재력 하나는 탁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엔 안 통했다. 평안도 용강 출신에 지주 집안이면, 주변 사람들 증언이 많을 법도 한데 단편적인 에피소드 몇개 말고는 안 나오더라.

이우정_ 박 처장은 그 시대를 말해주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 인물 안에 당시 군사정권이 가진 폭력적인 속성, 레드 콤플렉스라는 내적 트라우마를 상징화하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 모두 그 이데올로기 하나로 정권을 유지하던 세상이었다. 영화에서 이들을 상징화할 인물이 필요했고 그 대상이 박처장이었다.

김경찬_ 박 처장이 복잡한 게, 가령 박정희 시절에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게 있었다. 대통령 욕하면 끌고 가서 금방 ‘빨갱이’로 만들어버리는 거다. 그 시절에 유일하게 그 사람만 막걸리 보안법을 싫어했다고 하더라. 진짜 빨갱이가 아닌 사람을 빨갱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람에게 폭력은 마구 행사하는 사람이었다. 전두환이 86년 들어, 중요한 시기이니 치안본부장을 하라고 그에게 제안을 했는데 그것도 거절했다고 한다. 자기는 영원히 대공수사처에 남을 거라고.

이우정_ 치안본부장은 잘릴 수 있지만, 대공처장은 보다 센 물리력을 가졌다. 반짝 더 주목을 받기보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려고 한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다 들어 있는 인물인데,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칫 잘못하면 이 사람을 미화하게 되고, 또 그런 디테일들을 빼버리면 너무 밋밋한 악당으로만 남겠더라. 그런 지점이 가장 어려웠다.

김경찬_ 반대의 의미로 연희도 가장 어려웠던 캐릭터다. 나머지는 실존 인물들로부터 차용했다면 연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창작한 인물이다. 그런데 창작한 인물들을 실존 인물과 붙이려고 하니 잘 안 붙는 거다. 한병용(유해진)의 조카로 관계를 설정하기까지 정말 많은 과정을 거쳤다. 대사 한마디라도 혹시 이질적인 건 아닐까 다듬고 또 다듬었다.

이우정_ 당시 사건에 말리지 않았던 일반인들의 표상이 연희였다. 정말 그 시대의 수많은 연희들이 있었고, 또 연희를 통해서 지금의 관객도 그 시대를 봐줬으면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이었다.

<1987> 촬영현장.

-시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한 ‘나비효과’의 긍정과 달리, 당시 운동권 내부에서는 갈등이 적지 않았다. 군부독재, 공포정치를 일삼은 5공 정권을 와해시킨 6월항쟁 이후에도, 정권 이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암울한 현실이 줄을 이었다. 다시 영화에서 보여주는 한마음 한뜻과 희망적인 대단원과는 상충되는 현실들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김경찬_ 영화의 메인 테마는 6월항쟁이지만 내가 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은 궁극적인 것은 직업윤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 사람들의 직업윤리가 깨지기 시작했다. 그전만 해도 어떤 윤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면 “우리가 이런 거 해도 돼? 안 되잖아”, 이런 자기 점검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들 다 하는데 뭐” 이러는 거다. 사람들의 윤리가 무너지는 게 눈으로 보이더라. 영화는 자기 직업윤리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대립하고 있는 구조다. 영화 속 검사나 의사 같은 사람들은 권력의 압력에도 자기 직업윤리를 지킨 사람들이다. 교도관 한병용은 직업윤리로 봐서는 불법인데, 대의를 위해 그걸 버린 사람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대한민국을, 민주주의를, 후대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다. 역사를 기록하는 기념비적인 이야기면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어떻게 살아갈지 답을 구했으면 했다.

이우정_ 6월항쟁은 명백한 승리의 역사다. 정치적 거두들이 분열되면서 그들은 실패했지만, 이게 국민들의 실패는 아니다. 국민의 힘에 의해 무력으로 통치하던 세력들이 함부로 국민을 대하지 못하게 됐고, 그 체제를 통해서 지난 30년간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다. 항쟁이 아니라 ‘혁명’이었다.

김경찬_ 전세계 역사를 뒤져봐도 민주주의 70년사에 세번의 혁명을 거친 건 우리나라밖에 없다. 2016년 촛불시위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이전부터 가진 모순이 순식간에 바뀌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87년 승리의 기억이 2016년 촛불시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 승리의 기억이 있어서 우리가 광장에 설 수 있었던 거다. ‘권력 별거 아니야, 우리가 나서면 이겨나갈 수 있다’는 마음을 먹게 된 거다. 우리 모두 지난해에 경험을 해봤다. 200만명이 한목소리로 하나의 언어를 외칠 때, 그 찬바람에도 등줄기에 땀이 차오르는. 관객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영화가 아니라 몸속에 가진 그때의 경험을 되새김질하면서 호응하길 바란다. 우리는 그 기억 속에 있는 작은 단초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우정_ <1987>에서 하이라이트가 결국 마지막 광장이 되는 이유다. 이 영화의 힘은 결국 당시 광장에서 <아리랑> <애국가>를 부르며 투쟁하던 시민들의 뜨거운 에너지다. 승리이자 환희다. 그게 지금을 사는 내게도 힘이 되어주고, 이런 감정이 관객에게도 전달되는 영화가 되었으면 한다.

이우정 우정필름 대표는_ 노근리 학살사건을 소재로 한 , 한국전쟁 최후의 격전지를 그린 등의 제작에 참여해왔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그를 ‘한국 근현대사와 인물에 대한 관심이 높고, 스스로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소양이 뛰어난 사람’이라 칭한다. “중요한 건 역사를 다룬다는 게 아니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고 그를 통해 현재를 생각하는 그런 소재를 끊임없이 찾을 뿐이다.”

김경찬 작가는_ 마트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와 뺑소니 전담반을 그린 형사물 (2018년 개봉)의 각본에 참여했다. 방송 PD로 근 20년간 활동하다 시나리오작가로 전향했다. 뒤늦게 영화를 시작했지만 ‘방송 경력을 살린 또 다른 시각의 각본을 쓸 수 있지 않을까’하는 포부가 남다르다. “내 폴더에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역사적 순간들이 13가지 정도 있다. 주로 어떤 선택의 순간에서 백성, 민초들이 이기는 승리의 역사다.”


출처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9127


1987’ 제작자 “제가 용기를 냈다고요?”(인터뷰①)

2018-01-17 13:14:02
    


[뉴스엔 글 박아름 기자/사진 이재하 기자]

6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1987' 제작자를 만났다.

6월 민주 항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가 바로 이 우정필름 이우정 대표의 머리와 손에서 나왔다. 그리고 보란듯이 600만 관객을 돌파,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물론, 시작할 땐 우려하는 이들도 많았다. 작품을 기획해 작품을 관객들에게 선보이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을 거라 예상됐지만 의외로 '1987'은 많은 이들의 뜨거운 응원과 지지 속에 수월하게 만들어져 민주화운동이 30주년이라는 의미있는 해 2017년 12월27일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돕는듯 작품 기획부터 제작까지 모든 과정이 프리패스처럼 착착 진행됐다고.
이우정 대표는 '1987'과 같은 영화를 제작함에 있어 평소와 다른, 어떠한 용기를 낸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저 이우정 대표는 영화를 시작한 뒤 '1987'과 같이 팩트에 입각하거나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왔고, '1987' 역시 전작들과 궤를 같이할 뿐이었다. 우정필름이라는 사명으로는 '1987'이 그에게 첫 작품이 됐지만 제작자란 타이틀로 만든 작품 중엔 한국전쟁을 다룬 '고지전' '작은 연못', 7080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쎄시봉' 등이 있다. 이같은 작품들을 연결지어보면 '1987'이란 작품은 그에게 있어 그리 이상할 게 없는 결과물이다.

이우정 대표는 "용기는 아닌 것 같다. 궤적을 보면 내가 명필름 제작실에서 10년동안 근무하면서 영화를 했던 게 다 있는 것 같다. 명필름 안에서 '공동경비구역'이라는 작품도 했고, 그 궤적으로 보면 어느날 갑자기 '1987'을 한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역사, 사회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았다고 할 수 있고, 반대로는 다른 장르 영화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탓에 팩트 중심, 역사적 사실 중심의 구상이나 기획을 할 수 밖에 없는 능력의 한계가 있다. 그래서 '1987' 같은 장르의 영화에 귀착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용기라기보다는 나의 관심이 김경찬 작가라는 동지를 만나 불 붙은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우정 대표는 좋은 작가라는 확신이 들었던 PD 출신 김경찬 작가의 한 마디에 스파크가 튀어 함께 손을 잡고 '1987'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기에 더 애착을 갖고 준비했다.

"6월 항쟁은 보통 항쟁으로 표현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만든 동기이기도 한데, 6월 항쟁을 항쟁이 아니라 혁명으로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생각한다. 성공한 혁명이다. 국민들 입장에선 성공한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라고 하는 헌법을 쟁취했고, 그 헌법에 의해 30년간 선거를 치르고 스스로 대통령을 뽑았다. 그 성공 덕에 어찌보면 우리가 지금의 사상의 자유, 그 자유로운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의 입장에서는 성공한 건데 이건 혁명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했다. 국민이 승리했다는 걸 어떻게 해서든지 한 번 말하고 싶다고 하는 게 기본적으로 영화를 고민한 시작이었다. 87년 성공한 혁명이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자유로워졌고, 하다못해 87학번이 말하는 집회 시위와 88학번이 말하는 시위는 너무 다르다. 그 이전 학번들이 이야기할 때 거의 건물 옥상에 매달려서 선전물 몇 장 뿌리는 것만으로도 구속되고 이런 시절이었던 반면, 88학번 같은 경우 선전물을 뿌릴 수 있는 분위기라 할 정도로 6월 항쟁에 의해 문화가 바뀌었다. 사회의 공기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6월 항쟁이 갖는 역사적 의의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거고, 그 관심을 갖고 한 번 영화화해볼까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갖던 김경찬 작가가 그걸 나한테 던진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1987년 군사정권 시절, 학교에서 교련수업을 받던 평범한 고3 학생이었다는 이우정 대표가 6월 항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랬다. '1987'은 그렇게 시작한 영화다. 

개봉 시기도 중요했다. 이우정 대표는 6월 항쟁 30주년을 맞추고자 2017년을 개봉 시기로 정했다. 또 대통령 선거가 있었어야 할 2017년 '1987' 프로젝트를 정치적 권력의 과도기에 편승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 생각했고, 그것이 제작자로서 설정한 주요 목표였다.

많은 이들이 도와줬지만 어려운 부분도 분명 있었다. 어쨌든 '1987'은 상업영화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재구성한 영화다보니 팩트에 입각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숙명도 있었을테고, 관객들을 끌어들일 드라마나 영화적 재미도 추구해야 했다.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것도 까다로운 작업이 됐을 터. 이에 대해 이우정 대표는 걱정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시나리리오 과정을 말씀드리면 굉장히 독특하다. 안타고니스트(주인공에 대립적이거나 적대적인 관계를 맺는 인물)와 프로타고니스트(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가 있고 이 프로타고니스트가 끝까지 창을 던지고 칼을 휘두르고 이러면서 이야기가 전개돼야 하는데 칼을 휘두르는 사람, 도끼를 던지는 사람이 따로 있다. 구조 자체가 이런 영화다. 그 독특한 특성이 어찌보면 이 영화의 힘이지만, 독특한 구성 때문에 이 영화가 과연 상업 영화로서 자리를 잡을까, 기획이 될 수 있을까, 만들어질 수 있을까 굉장히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1987'엔 운이 따랐다.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너무 일이 제 때에 맞춰서, 타이밍에 맞춰서 잘 해결됐다고 평가가 된다. 진짜 필요할 때 배우들이 영화에 참여해줬고, 배우들의 힘으로 투자자들이 경쟁 관계로 투자 의사를 밝혀왔다. 사실 제작자로서 제일 행복한 일이 투자자를 골라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타이밍에 의한 것에서 이 영화가 내가 의도했던, 6월 항쟁의 30주년을 기념할 만한 기념비 같은 영화로서 물적인 부분까지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타이밍이 좋았다



." (인터뷰②에서 계속)

‘1987’ 제작자마저 울린 김종수, 그 뒷이야기(인터뷰②)
2018-01-17 13:15:01
    


[뉴스엔 글 박아름 기자/사진 이재하 기자]

(인터뷰①에 이어)

'1987'에서는 강동원, 설경구, 여진구, 우현 등이 특별출연, 김윤석 하정우 등이 주연진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유독 '1987'에서만큼은 주연, 조연, 특별출연이 의미가 없는 단어가 됐다. 사실 모두가 특별출연이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만 하다. '1987'은 누구에게 초점을 맞춰 보느냐에 따라 주인공이 달라지기도 하는 희한한 영화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1987'은 모두가 주인공인 영화인 셈이다.
모든 것이 조심스러운 영화였지만 개봉 전 유독 특별출연 부분에서만큼은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1987'은 많은 유명 배우들이 특별출연을 결정해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된 영화다. 결과적으로 '1987'의 유독 화려한 카메오 군단은 일각의 우려와 달리 독이 아닌 실이 됐다.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우리가 홍보 과정에서 그런 부분을 정말 조심스럽게 다뤘다. 그게 관객들한텐 선물 같이 전달됐다. 너무 유명한 배우들이 나오니까. 그러다가 배우가 사라지는데 또 다른 유명한 배우가 나온다. '서프라이즈'라기보단 그런 맥락으로 모든 배우들이 따로따로 놓여지는 게 아니라 전체 배우들이 릴레이 식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주인공이고 이들이 맞서는 안타고니스트는 박처장(김윤석)이고. 그런 드라마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의도였고, 그 의도가 헛점없이 잘 전달됐다고 지금 평가받고 있는 것 같다."

배우도 많고 명장면도 많고 명대사도 많은 '1987'. 이를 만든 이우정 대표도 쉽사리 명대사 하나를 꼽진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우정 대표는 "우리의 대사라기보단 우리가 시나리오 과정에서 자료를 보면서 뭉클했던 게 박종철 열사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자료조사 해보면서 스스로가 울컥했는데 그 후 자료조사를 해보면 장례를 치르고 나서 이 분이 부산시 공무원이었는데 상사들, 대공형사들이 다 와갖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니까 반 강제로 술을 먹이면서 위로한답시고 계속 이 분의 억울한 심정을 강압했다는 얘길 들었다. 그 말에 너무 화가 나고 울컥해지더라. 실제로 영화에서도 김종수 배우가 명연기를 하셔서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울 수 밖에 없었다. 그게 가장 명대사라고는 할 수 없는 명대사 아닐까 싶다. 난 눈물이 없는 편인데 그 장면만으로는 참으려 하다가도 울지 않을 수 없는 거다. 난 사실 엔딩에서 크게 울진 못했는데.."

추운 겨울 아들의 영정사진을 안고 아들이 잠든 차디찬 얼음물에 들어가는 투혼을 발휘한 김종수의 열연은 안 그래도 가슴아플 수 밖에 없는 장면을 절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만들었다. 

"그날이 첫 촬영이었고 마침 눈도 내렸다. 각오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순차적으로 촬영했다. 걱정했던 것들도 때가 되면 다 풀리고 그랬다. 내가 전체 촬영 자체를 참여하고 관리한 건 아니지만 현장에 있는 프로듀서에게 전달받은 바로는 어느 날 현장에 갔는데 점심 때쯤 비가 내렸다가 점심 지나니 멈췄다고 하더라. 누구 표현은 구름이 와서 해를 가려준다고 하던데 첫 촬영의 그 장면이야 말로 영화적으로 엄청난 미장센이라 표현할 수 있다. 눈이 내리고 강은 얼어있고 아버지의 눈물이 있고.. 그런 표현을 하는데 그것 자체가 어찌 보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자연이 만들어준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제작진 스스로 '이 영화는 뭔가 우리가 모르는 묘한 힘이 있다. 돕는 무언가의 힘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게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영화가 인기를 얻으면서 유족들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이우정 대표는 "고 박종철 열사님 형님분께서 언론시사회 때 영화를 보셨고, 그때도 영화를 보시고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이번 31주기 참배하면서 형님을 또 뵀는데 형님이 영화가 흥행하면서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주니까 사회적으로 재상기를 시켜준 거 아니냐. '다시 한 번 이 결과를 갖고 큰 힘이 됐다. 가족으로서, 형제로서 고맙다'는 말씀을 해주셨다"고 전했다. 이어 "고 이한열 열사님 어머님은 여러 차례 찾아뵙고 있다. 아직도 당신은 영화를 못 본다고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영화가 많은 사람들이 봐주길, 당신의 아들이 죽지 않는 영원한 사람들 속에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 전달되더라. 그런 차원에서 나로서는 뿌듯함과 책임감 같은 게 동시에 있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모시고 볼까요?'라고 했더니 '아니야' 이러시더라. 난 솔직히 안 보셨으면 좋겠다. 궁금하시겠지만 솔직히 부모님한테 보여드리긴 너무 모지지 않나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이쯤되니 '1987'로 역주행 신화를 쓰며 대박을 터뜨린 이우정 대표의 차기작이 궁금해졌다. 이우정 대표는 김경찬 작가와의 재호흡을 예고했다. '1987'의 뒤를 잇는 또다른 의미있는 작품 탄생에 대한 기대감이 벌써부터 높아진다. 

"아마도 '1987'과 궤를 같이 하게 되지 않겠나. '1987'도 서로 마음이 맞아 같이 했듯 다음 작품도 그런 것들이 맞지 않을까 싶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뉴스엔 박아름 jamie@ / 이재하 jud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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