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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2010 남도 자전거 여행

wooki. 2013. 12. 20. 15:32

 

 <해남 남도 한정식>


자전거 좀 타는 이들이라면 모두 아는 진리
"먹은 만큼 간다"

이번 남도 자전거 유람의 큰 즐거음 중 하나는 남도 맛집순방

입소문을 통해 아름 아름 찾아가던 먼 옛날과 달리
누구든지 몇 번의 검색만으로도 주루룩 쏟아지는 수 많은 맛집소개
맛집으로 방송 좀 탔다 싶으면 초심을 잃은 맛과 친절 대신 의례 벽면에 가득 붙어 있는 방송 출연 광고판
아, 왠지 그런 너무나 소문난 맛집은 싫다.

내가 원하는 맛집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으면서도 그 집의 색깔이 있는 음식을 내놓는 전통을 가진 집
그런데 그런 맛집을 어떻게 찾나? 
그런데로 여행을 여러번 하다보니 몸에 배인 맛집 찾는 감각, 
'아, 이 집 괜찮을 것 같은데...'  느낌으로 찾아간 집
다행히 이번에는 내 느낌이 들어 맞았다
서울서 이 멀리까지 찾아 온 보람이 있구나.
기다린지 한 참만에 산해진미가 가득 찬 상이 들어 올때 함께한 이들 모두 감탄사 연발, 다시 봐도 군침이 절로 돈다.
약간 허름한 건물과 따스하게 데운 온돌방은 식당에 왔다는 느낌보다 
시골 친척집에 와있는 편안함에 식사를 끝내고도 길 떠나기 싫을 정도로 뒹굴기 좋았다.
실지로 여기서 하룻 밤 자고 가면 안 돼냐고 떼를 쓰보기도 하였다.

 

 <해남 덕음산 자락 천연기념물 241호 비자숲>


녹우당(綠雨堂) 뒷 덕음산 중간 쯤을 가득 채운 평균 500년 수령의 아름드리 비자숲.
해남 윤씨 시조의 경고성 유언( "뒤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마을이 가난해 진다")에 따라 지금 까지 잘 간수 되었다고 한다.

 

 <어초은 윤효정 묘 앞 소나무 숲길>

 

 

 <녹우당(綠雨堂) 댓돌위에 가지런히 놓인 하얀 고무신>


녹우당(綠雨堂)이라는 이름의 유래
 효종(孝宗, 1619년~1659년, 재위 1649-1659, 조선의 제17대 임금)임금이 봉림대군 시절 스승인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집을 지워 주었다.
효 종이 죽자 낙향 하면서 수원집 일부를 뜯어 와 현 위치에 사랑채를 지었는데, 바람이 불 때면 뒤 산자락의 비자숲이 녹음 짙은 빗소리를 내는 듯 하여 綠雨堂이란 멋들어진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다. 그 사랑채의 이름이 현재는 종가 전체를 칭하게 되었다.

아, 여기서 우리 선조들의 풍류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임금이 하사한 집이니 얼마나 소중할까 만 서도. 수원에서 그 먼 남도 해남까지 뜯어서 가져 올 생각을 한 것이며.
사랑채에도 이름을 지워주는 재치랄까?

녹우당 옛주인의 풍류는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니.
녹우당 앞 마을 어귀에 자그마한 연못을 파고, 못 중간에 조그만 섬 하나 만들어 맵시 좋은 해송을 심은 거며
사랑채 앞 마당에도 작은 연못을 만들고, 조그만 정원을 가꾸고, 
사랑채를 나와 집 밖 왼쪽편으로 가다 보면 차 밭이 씨름판 서너크기는 넉넉히 되고
뒤 쪽으로 돌아 올라 가면 대숲이 한 자리 차지 하고 , 
그 대숲 지나 걷는 것 만으로도 눈과 마음의 평안을 주는 소나무 숲길, 
좀 더 올라가면 500년 넘은 비자 숲, 
더 올라가 덕음산 중턱에서 바라본 넓직한 들녘
아하...조선시대 양반이라는 어쩌면 특권만이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적 모습은 아닐까 싶다.

현재도 녹우당의 안채는 윤선도의 종손이 살고 있어서 구경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윤선도의 증손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240호)은 조선 시대 초상화 중 으뜸으로 꼽는데 역시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미황사>

 

예전 부터 꼭 한번 와보고 싶었으나 근처만 맴돌다 발 길을 돌리고 맘에만 담아 두었던 미황사.
뒤에 그닥 높지 않은 병풍바위를 배경으로 소박하게 자리한 절이
그저 떠도는 사진만으로 그려 보곤 했던 풍경 그 이상이다.
큰 길가에서 절까지 상당히 올라 가야 하는데
여느 절과는 판이하게 노점상하나 없이 조용하고 흔하디 흔한 밥집도 고작하나
대신 오르는 길 양 옆으로 아직은 때가 이른지 한꺼번에 활짝 피우지 못한 동백꽃이 듬성등성 하다.

 

 

 <미황사에서 바라본 남해>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때 의조하상이 창건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의조화상 꿈에 나타난 인도왕의 계시에 따라,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봉안할 곳을 찾아 나섰는데, 
남쪽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달마산 중턱에서 
소가 한 번 넘어지고 일어나 한 참 가다가 다시 넘어지더니 크게 울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한다.
그 자리에 세운 절이 미황사라 한다.
美는 소의 울음이 매우 아름다워서 따오고
黃은 꿈 속에 나타난 인도왕의 빛에서 따왔다 한다.
물론 이 설화를 고증할 자료나 의조하상의 존재는 불분명하나 우리 나라 불교의 남방해로 전래설을 뒷받침한다.

한 눈에 들어오는 남해를 보니, 그 당시 그 머나먼 중국을 거쳐 험한 북쪽 육로로 통해서 이 멀리까지 전파 되었다는 것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천일각에서 바라본 구강포>


이 근방을 여행한게  이번이 네번째인데,
매번 비가 내린다.
이번에도 변함없이.

다산 초당은 강진 도암면에 차나무가 많아 다산(茶山)이라는 별명을 가진 만덕산(정약용의 호 다산은 여기서 유래)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 다산초당은 정약용에는 먼 외가쪽 일가되는 해남 윤씨 윤단의 산정이었다.
유배중이던 정약용을 윤단의 아들인 윤문거 세형제가 초빙하여 머물게 되면서 현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다산은 18년의 유배생활 중 10년을 이 다산초당에 머무르며 제자를 가르치고, 수 많은 책을 저술 하였다.
현재는 초당이라는 소박한 이름과 달리 1957년에 복원되어 정면 5칸 측면2칸의 팔각지붕 기와집이다.

힘들었을 유배시절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자기 나름의 위안 삼을 작은세계를 만든 흔적이 여기 저기 남아 있다.
솔방울 태워 차를 우려 마셨을 앞마당의 넓적바위(차부뚜막)
조그만 연못을 파고 계곡물을 끌여 들여 만든 작은 폭포
좁은 둔덕에 작은 채소밭
연못에 드리운 백일홍
구강포가 시원하게 들어오는 천일각

천일각은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정약용 유배시절 교류했던 혜장선사가 거처하던 절)로 이어지는 오솔길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천일각에서 바라보는 구강포의 시원하게 확 트인 풍경과 혜장선사와의 교류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유배생활의 불안함을 그나마 위로해 주었으리라.

다산의 대표저서 "목민심서"(1818년) 서문에서
"군자가 학문을 하는 것은
반은 수신하기 위함이요.
반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함인데
요즘 지방 장관이란 자들은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는데 바쁘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곤궁하고 피폐해져 떠돌다가 굶어죽은 시체가 구렁텅이에 가득하건만
지방 장관 된 자들은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 찌우고 있다"

 20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 놈의 썩은 위정자들은 여전하니.
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영랑생가>


'북도에 소월이 있다면 남도에 영랑' 
서정시인 영랑 김윤식의 생가
시인으로만 알고 있지만.
강진에서 우익 단체인 대한청년회 단장을 맡기도 하고, 
국회의원선거에도 출마했으며, 이승만 정권하에서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우람한 동백나무아래 모란>

 

모란이 피기까지는
아직 멀었나보다.
집 여기 저기 뒤안 가득 둘러선 우람한 동백나무가 
떨어뜨린 새빨간 꽃잎에 시 한 수 절로 지어 질 듯도 싶다

 

 

 <풀무>


참으로 오랜 간만에 본 정겨운 풀무.
나중에 나이 들어 손수 내 집을 짓는다면
방 하나는 구들을 놓고 아궁이을 만드리라.
그 때 이 녀석이 꼭 필요할 텐데.

 

 

 <기와삼간>


영랑생가 뒤쪽으로 200m에 올라가니 
강진이 한 눈에 싹 들어 오는 자리에 
소나무숲과 하나가 된듯 들어앉은 아담한 집 한채.
나중에 집을 짓는 다면 이런 단촐하고 자연에 묻힌 듯 조용한 집을 짓고 싶어라.

 

 <덕제리 큰들>


강진을 벗어나 탐진강을 왼쪽에 끼고 시골 마을 여기 저기 휘젓고 가다가,
이번 여행에서 첫 대면하게 되는 야트막한 고개 자울재
그 고개를 넘다 보니 저 아래 큰들이 펼쳐지고 들 넘어 탐진강이 있는 듯 없는 듯 흐른다.

 

 <실개천 다리위에서>


 길 나선 지 처음으로 햇살 좋고. 온도도 자전거 타기 마침맞다.
번잡하고 따분한 아스팔트는 의도적 피하다 보니..만난 어느 이름 모를 들판 실개천 다리 위에서

 

 

 <거울 속 남도>


자전거 여행을 하다 보면 항상 아쉬운 것이
앞 길만 보고 가야한 다는 것이다.
내 뒤 풍경도 함께 보고 싶은데.
아쉬운데로 조그만 거울 속에 담긴 
가을 하늘처럼 쨍하지는 않지만 새파란 하늘, 흐리멍텅 뭉게 구름, 연초록 들판, 논두렁길

 

 

 <지나온 들녁 풍경>


한적한 들녁 논두렁이 끝나고 다시 한번 뒤 돌아 본다.

 

 

 <보리밭>


유난히 눈도 많이 오고 추운 겨울을 잘도 견뎌냈구나

 

 

<남도의 골목길>


알록달록 예전엔 이런 한적한 골목길도 흔 했는데.
볕 쬐러 나오신 할머니 할아버지, 정겹게 어디 가냐고 물어보시고...
이제는 천편일률 비슷한 번잡 풍경에 주차된 차가 자리를 빽빽히 차지 하고, 
혹여 비어 있으면 흉물스런 주차금지방해물만 가득한 골목길 
 

 

 

 <늦은 점심>


이것은 단지 전체 요리 일뿐!

혼자 여행할 때의 자유와 호젓함도 좋지만.
가장 아쉬운 것은 이런 진수성찬에 술 한잔 하기 힘들다는 것.
함께한 이들이 있어 즐겁다.
술 한잔 하고 나니 길 떠나기 싫네...

 

 

 <보성차밭1>


모 광고로 너무나 유명해져서 식상해져 버린 보성 차밭,
아직은 남들이 잘 가지 않는 봇재 비포장 길을 따라가다 보니 
길은 급경사로 힘은 들지만 호젓함이 좋구나.

 

 

 <보성차밭2>

 

 

 <보성차밭3>

 

 

 <낙안읍성>


해남에 도착한 첫날부터 이슬비가 내리더니
마직막 날도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순천만까지 둘러 보고 싶은 맘이 없지 않으나
항상 무언가 여행의 아쉬움을 남겨 두기에 
또 길을 떠난다는 핑계거리가 생기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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